새뮤얼 스마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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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새뮤얼 스마일스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자조(Self-Help)를 강조하는 사상으로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의사, 저널리스트, 철도 비서 등의 다양한 경력을 거치며, 1859년 출간한 저서 《자조론》을 통해 개인의 노력과 자기 계발을 통한 성공을 역설했다. 스마일스는 《자조론》 외에도 《인격론》, 《검약》 등 여러 저서를 통해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관을 옹호했으며, 그의 사상은 자유주의적 가치관을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의 저작은 한국, 일본 등 여러 국가에 번역되어 영향을 미쳤지만, 사회 자유주의와 케인스 경제학의 등장과 함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스코틀랜드 이스트로디언의 해딩턴에서 태어난 새뮤얼 스마일스는 엄격한 개혁 장로교도 집안에서 자랐으나, 본인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14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의사가 되기 위해 도제 생활을 시작했으며,[1] 이를 통해 1829년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며 정치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다. 1832년 아버지가 1832년 콜레라 유행으로 사망한 후, 어머니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어머니의 모습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새뮤얼 스마일스의 사상은 초기 정치 개혁 참여에서 점차 개인의 자조와 절약 정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젊은 시절에는 의회 개혁을 지지하고 리즈 타임스 편집자로서 차티스트 운동의 목표를 지지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에 관심을 보였다.[1] 그는 여성 참정권, 자유 무역, 의회 개혁 등 다양한 급진적 대의를 옹호했다.
2. 생애
1837년부터 의회 개혁을 지지하는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으며,[1] 1838년에는 개혁주의 신문인 리즈 타임스의 편집장으로 초빙되어 1842년까지 활동했다.[2] 이 시기 그는 여성 참정권, 자유 무역, 의회 개혁 등 급진적인 주장을 옹호하고 차티스트 운동을 지지하는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차티스트 운동의 물리력 사용 방식에 우려를 표하며 단순한 정치 개혁만으로는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1843년 사라 앤 홈스 딕슨과 결혼하여 세 딸과 두 아들을 두었다. 1845년 리즈 타임스를 떠나 새로 설립된 리즈 & 시르스크 철도의 비서가 되었고, 이후 사우스 이스턴 철도에서도 근무했다.
1850년대에 들어 의회 정치에 대한 관심을 접고 개인의 자조 정신이 개혁의 핵심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1859년 그의 대표작인 자조: 인격과 행동의 예시를 출판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에도 ''쿼털리'' 등에 글을 기고하며 철도 국유화나 노동자의 근검절약 등을 주장했다.[4][5]
1866년에는 국립 자선 기관의 회장을 맡았으나, 1871년 뇌졸중 발병 후 사임했다. 말년에는 글래드스턴 총리가 추진한 제2차 아일랜드 자치법안에 대해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19][20]
1904년 4월 16일, 스마일스는 런던 켄싱턴에서 9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브롬톤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망 직전 기사 작위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손자 중에는 얼스터 연합당 국회의원이었던 월터 스마일스 경이 있으며, 유명 모험가 베어 그릴스 역시 그의 증손자이다. 조지 리드 경이 그린 그의 초상화(1877년 완성)는 현재 런던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18]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스코틀랜드 이스트로디언의 해딩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해딩턴의 새뮤얼 스마일스, 어머니는 달키스의 자넷 윌슨이었으며, 그는 살아남은 11명의 자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가족은 엄격한 개혁 장로교도였지만, 스마일스 본인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
그는 지역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4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로버트 루윈스 박사 밑에서 의사가 되기 위한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1] 이러한 과정을 거쳐 스마일스는 1829년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대학 시절 그는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조지프 흄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
1832년 아버지가 1832년 콜레라 유행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스마일스는 어머니의 지원 덕분에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주님께서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작은 가족 잡화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꾸렸다. 자신과 아홉 명의 어린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스마일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가 때로는 그의 개혁 장로교 선조들과는 다른, 너그럽고 관대한 견해를 갖게 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2. 2. 저널리스트로서의 경력
1837년, 새뮤얼 스마일스는 의회 개혁을 지지하는 글을 ''에든버러 위클리 크로니클''과 리즈 타임스에 기고하며 언론 활동을 시작했다.[1] 1838년 11월, 그는 ''리즈 타임스''의 편집장으로 초빙되어 1842년까지 활동했다.
편집장 재임 기간 동안 스마일스는 여성 참정권, 자유 무역, 의회 개혁 등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사회 개혁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840년 5월에는 리즈 의회 개혁 협회의 비서가 되었다. 이 단체는 차티스트 운동의 6가지 목표, 즉 21세 이상 모든 남성의 보통 선거권 보장, 동일한 규모의 선거구 설정, 비밀 투표 실시, 재산 자격 요건 폐지, 영국 의회 의원에 대한 급여 지급, 매년 의회 소집 등을 지지하는 조직이었다.
그러나 184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스마일스는 차티스트 운동 내 일부 지도자들, 특히 퍼거스 오코너와 조지 줄리안 하니 등이 물리적인 힘의 사용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차티스트 운동의 전략이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했으며, "단순한 정치 개혁만으로는 현재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845년, 스마일스는 ''리즈 타임스''를 떠나 새로 설립된 리즈 & 시르스크 철도의 비서로 자리를 옮기며 저널리스트로서의 경력을 마무리했다.
2. 3. 작가로서의 전환
스마일스는 의사이자 저널리스트로서 경력을 쌓으려 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여러 협동 사업에도 참여했지만 자본 부족으로 실패를 겪었다.[11] 이러한 경험 후 그는 중산층 유토피아주의에서 벗어나 자기 계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하며 지적 피난처와 국가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11]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자기 계발(Self-Help)의 아이디어는 1845년 3월, 상호 발전 협회의 요청으로 했던 강연에서 비롯되었다. '노동 계급의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 강연에서 스마일스는 단순히 부나 사회적 명성을 얻는 것만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식'' 자체는 가장 높은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무지한 사람은 감각적인 즐거움을 제외한 모든 즐거움에 무감각한 채로 세상을 지나갑니다... 모든 인간은 수행해야 할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훌륭한 능력을 배양해야 하며, 광대한 운명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는 교육을 받을 수단과 자신의 신성한 본성의 모든 힘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단을 가져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교육과 자기 계발의 본질적인 가치를 역설했다.
하지만 자기 계발의 출판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1855년, 새로 설립된 루틀리지 출판사는 이 책의 출판을 거절했다.[12] 20년 후 스마일스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조지 루틀리지 옆에 앉아 "스마일스 박사님, 언제 저희가 박사님의 책을 출판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받았고, 이에 스마일스는 루틀리지 씨가 이미 자기 계발 출판을 거절하는 영광을 누렸다고 답했다.[13] 이후 존 머레이 출판사가 절반의 이익을 나누는 조건으로 출판을 제안했지만, 스마일스는 책 속의 일화들을 그대로 살리고 싶었기에 이를 거절했다. 결국 1859년, 스마일스는 자신의 저작권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존 머레이에게 10%의 수수료를 지불하고 책을 직접 출판했다.[13]
자기 계발은 출간되자마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출판 첫해에만 2만 부가 판매되었고, 스마일스가 세상을 떠난 1904년까지 총 25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14] 이 책은 스마일스를 하룻밤 사이에 유명인사로 만들었으며, 그는 전문가이자 많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구루가 되었다.[15] 스마일스는 갑자기 유명해져 주춧돌 놓기 행사 참석, 초상화 모델 서기, 고아들에게 상 수여하기, 강연 등 다양한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이러한 초대에 응하기보다는 자신의 저술 활동에 집중하고자 했다.[16]
2. 4. 말년
1892년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다시 권력을 잡고 총리로서 제2차 아일랜드 자치법안을 도입했을 때, 스마일스는 얼스터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반항하지 말게. 조용히 있게. 비록 자네 이름이 선동가 명단에 있는 것을 보았지만... 자네 편지는 끔찍할 정도로 충격적이야... 글래드스턴이 권력을 잡았고 우리는 내전에 직면해 있어. 이것이 훌륭한 정치의 결과일 수는 없어. 그러나 저 미치광이를 응원하는 자유당 의원들이 있다니. 아, 자유주의여!"라고 적으며, 얼스터 사람들에게 무기를 지원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19] 이듬해인 1893년에도 루시 스마일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자치법안은 끔찍하네... 나는 그 불쌍한 사냥개, 오명을 쓴 정치가가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에 완전히 경악했네.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양 떼처럼 그 미치광이를 따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네. 그는 그저 자기 과신으로 터져 나올 지경이네. 아, 자유주의여!"라며 글래드스턴과 그의 정책을 거듭 비판했다.[20]
1904년 4월 16일, 새뮤얼 스마일스는 92세의 나이로 런던 켄싱턴에서 사망했으며 브롬톤 묘지에 묻혔다. 사망 직전에 기사 작위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스마일스의 손자 중 한 명인 월터 스마일스 경은 얼스터 연합당 소속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이 가계를 통해 유명 모험가인 베어 그릴스 역시 그의 증손자가 된다.
3. 사상
그러나 1840년대 후반, 스마일스는 차티스트 운동 내 일부 세력의 물리력 사용 방식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운동의 현재 전술이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는 "단순한 정치 개혁만으로는 현재 사회를 괴롭히는 다양한 악을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정치 개혁의 한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 스마일스는 의회 개혁과 같은 정치적 수단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개인의 노력과 책임감, 즉 자조(Self-Help)가 개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러한 생각은 1859년 출간되어 큰 성공을 거둔 그의 대표작 ''자조: 인격과 행동의 예시''에 집약되어 있다. 그는 ''쿼털리''에 기고한 글들을 통해 자신의 변화된 관점을 드러냈는데, 철도의 국유화와 3등석 승객 장려를 주장하기도 했으나,[4] 다른 글에서는 많은 경우 빈곤이 노동자 개인의 근검절약 습관 부족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하며 절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5][6]
한편, 그는 사회 문제에 대한 방관자적 태도, 특히 자유방임주의 사상을 강하게 비판했다.[8] 그는 1834년 구빈법 개정안을 "근대 시대에 법전에 기록된 가장 가치 있는 법안 중 하나"라고 평가하며[7] 사회적 책임과 개입의 필요성을 일부 인정하기도 했다. 의사이자 저널리스트, 사업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그는 결국 개인의 자기 계발을 강조하는 사상을 통해 지적 피난처와 국가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11]
3. 1. 자조(Self-Help) 정신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자기 계발(Self-Help)의 사상적 뿌리는 1845년 3월, 상호 발전 협회(Mutual Improvement Society)의 요청으로 했던 강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강연 내용은 이후 ''노동 계급의 교육(The Education of the Working Classe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강연에서 스마일스는 지식 습득 자체를 "가장 높은 즐거움 중 하나"로 규정하며, 무지한 사람은 감각적 쾌락 외에는 다른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세상을 살아간다고 지적했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는 "수행해야 할 위대한 사명", "배양해야 할 훌륭한 능력", "성취해야 할 광대한 운명"이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자신의 잠재력을 자유롭게 발휘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11]
1881년의 저술에서 그는 빈곤의 원인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이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개인의 선택, 특히 도덕적 나태함이나 다른 사람의 노동에 기대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동은 고되고 그 이득은 느리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그 결정을 내리는 순간부터 사회의 적이 된다"고 보았으며, "빈곤이 사람들을 범죄로 몰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열에 아홉 번은, 필요가 아니라 선택이다"라고 단언했다. 또한 그는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아첨하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정치적 선동가들을 비판하며, 개인이 스스로의 고통에 책임감을 느끼고 개선의 노력을 해야 함을 역설했다.[10]
한편, 스마일스는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오염된 음식이나 물 공급, 불결한 주거 환경과 같은 사회 문제의 책임을 '아무도'에게 돌리며 방치하는 태도를 "끔찍한 이론"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개인의 자조 정신을 강조하면서도,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무관심이나 방관과는 선을 긋는 그의 입장을 보여준다.[8]
자기 계발은 처음 루틀리지 출판사로부터 출판을 거절당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12] 이후 1859년, 존 머레이 출판사와 저작권은 스마일스가 갖고 판매액의 10%를 수수료로 지불하는 조건으로 출간되었다.[13] 이 책은 출간 첫해에만 2만 부가 판매되었고, 스마일스가 사망한 1904년까지 총 25만 부 이상 판매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14] 이 책의 성공으로 스마일스는 하룻밤 사이에 유명 인사가 되었으며, 자기 계발 분야의 선도적인 전문가이자 많은 사람들이 조언을 구하는 구루(Guru)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15][16]
3. 2. 빅토리아 시대 가치관 옹호
1875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절약』에서 새뮤얼 스마일스는 "부유함이 어떤 차별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를 그 자체로 숭배하는 것은 천박한 자들뿐이다."라고 말하며 물질만능주의를 경계하고 절약 정신을 강조했다.[6]
그는 당시 사회 문제에 대한 방관자적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는데, 특히 자유방임주의 사상을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했다. 그는 "장티푸스나 콜레라가 발생하면, 그들은 아무도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며, 오염된 음식과 물, 질병의 확산, 열악한 주거 환경 등 다양한 사회 문제의 책임을 '아무도(Nobody)'에게 돌리는 세태를 비판했다. 이러한 문제들이 결국 "내버려두어라(Laissez-faire)"라는 무책임한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며, 구매자 주의 원칙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개입이 필요함을 역설했다.[8]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며, 1834년 구빈법 개정안을 "근대 시대에 법전에 기록된 가장 가치 있는 법안 중 하나"라고 평가하며 지지 의사를 밝혔다.[7]
1881년의 저술에서는 노동의 고됨과 느린 결실을 인정하면서도, 타인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가려는 이들을 "사회의 적"으로 규정했다. 그는 빈곤이 범죄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보다는 개인의 "선택"과 "도덕적 비겁함"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또한, 대중의 정치적 권력 행사가 커짐에 따라 그들에게 아첨하고 무조건적으로 칭찬하는 경향을 속물근성이라 비판했으며, 자본가를 단순히 "노동으로 얻은 모든 것을 다 쓰지 않는 사람"으로 정의하며 절약과 축적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10]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자기 계발』(''Self-Help'')의 사상적 기반은 1845년 '노동 계급의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연설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연설에서 그는 단순히 부나 사회적 명성을 얻는 것을 넘어 "지식 자체는 가장 높은 즐거움 중 하나"이며, "모든 인간은 수행해야 할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훌륭한 능력을 배양해야 하며, 광대한 운명을 성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교육을 통해 모든 개인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3. 3. 사회 개혁에 대한 관점
새뮤얼 스마일스의 사회 개혁에 대한 관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초기에는 급진적인 정치 개혁을 지지했으나, 점차 개인의 책임과 노력을 통한 개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837년, 스마일스는 의회 개혁을 지지하며 ''에든버러 위클리 크로니클''과 리즈 타임스에 글을 기고하며 사회 개혁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1] 1838년부터 1842년까지 ''리즈 타임스''의 편집자로 활동하면서 여성 참정권, 자유 무역, 의회 개혁 등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주장들을 옹호했다. 1840년에는 리즈 의회 개혁 협회의 비서가 되어 차티스트 운동의 주요 목표인 21세 이상 모든 남성의 보통 선거권, 동일 선거구, 비밀 투표, 의원 재산 자격 폐지, 의원 급여 지급, 연례 의회 개최 등을 지지했다.
그러나 1840년대 후반에 이르러 스마일스는 차티스트 운동 내 일부 급진파, 특히 퍼거스 오코너와 조지 줄리안 하니 등이 주장하는 물리력 사용 방식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당시 차티스트 운동의 방식이 효과적이지 않다고 보았으며, "단순한 정치 개혁만으로는 현재 사회를 괴롭히는 다양한 악을 치료할 수 없다"고 언급하며 정치 개혁의 한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1850년대에 들어서면서 스마일스는 의회 개혁과 같은 정치적 수단보다는 개인의 자조(Self-Help)가 사회 개혁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1859년에 출판된 그의 대표작 ''자조: 인격과 행동의 예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쿼털리''에 기고한 글들을 통해 자신의 변화된 관점을 드러냈다. 철도에 관한 글에서는 철도의 국유화와 서민들을 위한 3등석 승객 이용 장려를 주장하기도 했으나,[4] 1861년 '노동자 소득, 저축 및 파업'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빈곤의 주요 원인이 노동자 개인의 근검절약 습관 부족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입이 최고조에 달하고 공장이 풀가동되는 번영의 시대는 기계 학교와 학교가 번성하는 시기가 아니라 주류 판매인과 맥주 판매인이 번영하고 부자가 되는 시기"라고 지적하며, 높은 임금(주당 50~60실링으로 당시 은행원 급여보다 높은 수준)을 받는 노동자조차 비참한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생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더 나은 숙소를 얻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개인의 부주의함 때문이라고 보았다.[5] 이러한 주장은 당시 사회 구조적인 문제보다는 개인의 책임에 무게를 두는 시각을 반영한다.
이후 스마일스는 1866년 국립 자선 기관의 회장을 맡았으나 건강 문제로 1871년에 사임했고, 1868년에는 노동자들의 주택 마련을 돕기 위한 상호 부조 성격의 글로브 영구 급여 건물 협회 창립 이사로 3년간 참여하기도 했다.
4. 저작
스마일스는 의사나 저널리스트로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고, 참여했던 여러 협동 사업도 자본 부족으로 실패했다. 이러한 경험을 거친 후 그는 중산층 유토피아주의에서 벗어나 자기 계발이라는 주제에 집중하며 저술 활동을 통해 지적 피난처와 국가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11]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자기 계발(Self-Help)은 1845년 3월, 상호 발전 협회의 요청으로 했던 '노동 계급의 교육'에 관한 연설에서 비롯되었다. 이 연설에서 스마일스는 지식 자체의 중요성과 모든 인간이 가진 잠재력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루틀리지 출판사는 1855년에 이 책의 출판을 거절했으나[12], 스마일스는 포기하지 않고 1859년 존 머레이를 통해 저작권을 자신이 가지는 조건으로 직접 출판했다.[13] 『자기 계발』은 출간 즉시 큰 성공을 거두어[14] 스마일스를 유명 인사로 만들었으며[15], 그는 이후 강연 요청 등에 응하기보다 저술 활동에 더욱 집중했다.[16]
이 외에도 스마일스는 인격론(Character, 1871), 검약(Thrift, 1875), 의무론(Duty, 1880), 삶과 노동(Life and Labour, 1887) 등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특히 『검약』에서는 "부유함이 어떤 차별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를 그 자체로 숭배하는 것은 천박한 자들뿐이다."[6]라고 말하며 물질 만능주의를 경계했고, 자유방임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며 사회 문제에 대한 개인과 공동체의 책임을 강조했다.[8] 그는 1834년 구빈법 개정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7] 또한 노동의 가치, 빈곤과 범죄의 원인에 대한 자신의 견해, 그리고 당시 정치인들의 대중 영합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10] 그는 아들 새뮤얼 스마일스 주니어가 쓴 여행 기록을 편집하여 1871년에 『소년의 세계 일주』라는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9]
스마일스는 자기 계발 서적 외에도 산업 혁명 시대를 이끈 공학자, 발명가, 산업가들의 삶을 다룬 다수의 전기를 집필하며 전기 작가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자세한 저서 목록은 하위 섹션 참조)
4. 1. 주요 저서
- 자조론 Self-Help: With Illustrations of Character, Conduct, and Perseveranceeng (1859): 스마일스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로 꼽힌다. 출간 첫해 2만 부가 판매되었고, 1904년 스마일스 사망 시까지 25만 부 이상 판매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14] 이 책은 스마일스를 유명 인사로 만들었으며[15], 개인의 노력과 인내를 통한 성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책의 내용은 1845년 스마일스가 상호 발전 협회의 요청으로 진행했던 '노동 계급의 교육'에 관한 연설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존 머레이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13]
- 인격론 Charactereng (1871)
- 검약 Thrifteng (1875): 이 책에서 스마일스는 "부유함이 어떤 차별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를 그 자체로 숭배하는 것은 천박한 자들뿐이다."라고 주장했다.[6] 또한, 당시 사회 문제에 대해 개인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며 자유방임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8]
- 의무론 Duty: With illustrations of courage, patience and enduranceeng (1880): 용기, 인내, 지구력 등 다양한 사례를 통해 개인이 사회와 자신에 대해 가지는 의무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 삶과 노동 Life and Laboureng (1887)
4. 2. 전기
1871년에는 아들 새뮤얼 스마일스 주니어(1852년 출생)가 십 대 시절 건강을 위해 항해하며 쓴 편지와 1869년 2월부터 1871년 3월까지 호주와 미국으로의 여행 기록을 편집하여 『소년의 세계 일주』라는 제목으로 런던에서 출판했다.[9]1875년에는 그의 저서 『절약』(Thrift)이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부유함이 어떤 차별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를 그 자체로 숭배하는 것은 천박한 자들뿐이다."라고 말하며 부의 맹목적인 숭배를 경계했다.[6] 그는 1834년 구빈법 개정안을 "근대 시대에 법전에 기록된 가장 가치 있는 법안 중 하나"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7] 또한 당시 만연했던 자유방임주의 사상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하며 사회 구성원의 책임을 강조했다.
:장티푸스나 콜레라가 발생하면, 그들은 아무도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그 끔찍한 아무도! 그는 얼마나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가. 아무도보다 더 많은 해악을 끼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다. 아무도 우리의 음식을 속이지 않는다. 아무도 우리에게 나쁜 술로 독을 칠하지 않는다. 아무도 우리에게 오염된 물을 공급하지 않는다. 아무도 맹지와 청소되지 않은 골목에 열을 퍼뜨리지 않는다. 아무도 배수되지 않은 마을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아무도 감옥, 교도소, 형무소를 채우지 않는다. 아무도 밀렵꾼, 도둑, 술꾼을 만들지 않는다. 아무도 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 끔찍한 이론이다. 그것은 두 단어로 요약된다. ''자유방임주의'' — 내버려두어라. 사람들이 석고와 섞인 밀가루에 의해 중독될 때, "내버려두어라"가 해결책이다. ''코클루스 인디쿠스''가 홉 대신 사용되어 사람들이 조기에 사망할 때, "아무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기 쉽다. 속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알아내도록 하라: ''구매자 주의''. 사람들이 불결한 집에 살 때, 내버려두어라. 불행이 그 역할을 하도록 놔두어라; 죽음에 간섭하지 말라.[8]
1881년에는 노동의 가치와 개인의 책임, 그리고 당시 정치 세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노동은 고되고 그 이득은 느리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그 결정을 내리는 순간부터 사회의 적이 된다. 빈곤이 사람들을 범죄로 몰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열에 아홉 번은, 필요가 아니라 선택이다. 도덕적 비겁함은 사생활만큼이나 공공생활에서도 드러난다. 속물근성은 부자에게 아첨하는 데 국한되지 않고, 가난한 사람에게 아첨하는 데서도 상당히 자주 나타난다... 이제 "대중"이 정치적 권력을 행사함에 따라 그들에게 아첨하고, 그들을 칭찬하며, 그들에게 부드러운 말만 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미덕을 인정받는다. 그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실행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종종 공감하는 척한다. 인기 있는 선동가는 그의 연설을 듣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하며, 다른 사람이 우리가 겪는 고통에 대해 비난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것은 항상 우리의 자존심을 매우 만족시킨다. 그래서 이러한 웅변가들은 그들에게 연설을 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스스로 비난을 받아야 하거나, 그들이 그들의 손이 닿는 행복의 수단을 잘못 사용한다는 것을 제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 자본가는 단순히 노동으로 얻은 모든 것을 다 쓰지 않는 사람이다.[10]
스마일스는 전기 작가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공학자, 발명가, 산업가 등 산업 혁명 시대를 이끈 인물들의 삶을 조명하는 데 힘썼다. 그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출판 연도 | 제목 | 비고 |
---|---|---|
1857 | 조지 스티븐슨의 생애 (Life of George Stephenson) | |
1859 | 조지 스티븐슨의 생애 이야기 (The Story of the Life of George Stephenson) | 런던 출판, 위 책의 요약본 |
1860 | 간단한 전기 (Brief Biographies) | 보스턴 출판, 정기 간행물 기고문 재수록 |
1862 | 엔지니어의 삶 (Lives of the Engineers) | 총 5권 |
1권 | 초기 엔지니어: 제임스 브린들리, 코르넬리우스 버뮤덴 경, 휴 미들턴 경, 존 페리 선장 | |
2권 | 항구, 등대 및 다리: 존 스미턴, 존 레니 | |
3권 | 도로의 역사: 존 메트칼프, 토머스 텔퍼드 | |
4권 | 증기 기관: 볼턴 앤 와트 | |
5권 | 증기 기관차: 조지 스티븐슨, 로버트 스티븐슨 | |
1863 | 산업 전기 (Industrial Biography) | 앤드루 야란턴, 벤자민 헌츠먼, 더드 더들리, 헨리 모들리, 조셉 클레멘트 등 포함 |
1865 | 볼턴 앤 와트 (Lives of Boulton and Watt) | |
1867 | 위그노: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서의 정착지, 교회 및 산업 (The Huguenots: Their Settlements, Churches and Industries in England and Ireland) | |
1870 | 프랑스 위그노 (The Huguenots in France) | |
1874 | 엔지니어의 삶 (Lives of the Engineers) | 신판, 스티븐슨과 볼턴 앤 와트의 생애 포함 |
1875 | 스코틀랜드의 박물학자: 토마스 에드워드의 생애 (Life of a Scotch Naturalist: Thomas Edward) | |
1878 | 조지 무어, 상인 및 자선가 (George Moore, Merchant and Philanthropist) | |
1878 | 로버트 딕, 서소의 제빵사, 지질학자 겸 식물학자 (Robert Dick, Baker of Thurso, Geologist and Botanist) | |
1884 | 발명과 산업의 사람들 (Men of Invention and Industry) | 피니어스 페트, 프랜시스 페티트 스미스, 존 해리슨, 존 롬베, 윌리엄 머독, 프레데릭 쾨니히, The Times의 월터 가문, 윌리엄 클로스, 찰스 비안코니, 아일랜드 산업, 벨파스트 조선, 천문학자 등 포함 |
1885 | 제임스 네이스미스, 엔지니어, 자서전 (James Nasmyth, Engineer, An Autobiography) | 편집 담당 |
1891 | 출판인과 그의 친구들. 고 존 머레이의 회고록 및 서신 (A Publisher and his Friends. Memoir and Correspondence of the late John Murray) | |
1891 | 자스민. 이발사, 시인, 자선가 (Jasmin. Barber, Poet, Philanthropist) | |
1894 | 조지아 웨지우드, 그의 개인사 (Josiah Wedgwood, F.R.S. His Personal History) | |
1905 | 새뮤얼 스마일스 자서전, LLD (The Autobiography of Samuel Smiles, LLD) | T. 매케이 편집, [https://books.google.com/books?id=DstIAAAAMAAJ 뉴욕 판] |
이 외에도 자조론(Self-Help, 1859), 인격론(Character, 1871), 『절약』(Thrift, 1875), 『의무론』(Duty, 1880), 『인생과 노동』(Life and Labour, 1887) 등 개인의 발전과 사회적 덕목을 강조하는 저서들을 다수 남겼다. 1960년대 이후 영국의 산업 고고학과 역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그의 저서 중 일부가 재인쇄되었으며,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등을 통해 온라인으로도 접할 수 있다.
5. 유산과 영향
새뮤얼 스마일스의 사상, 특히 그의 대표작 자조론(
특히 일본에서는 나카무라 마사나오가 번역한 ''서국립지편''이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다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개화기 지식인들에게 그의 자조 정신이 소개되면서, 근대적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미국 등 다른 서구권 국가에서도 그의 저작은 개인의 성공과 발전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하면서 스마일스의 사상은 다양한 관점에서 비판과 재평가를 받기도 했다. 개인의 노력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간과한다는 비판과 함께, 경제 상황 변화에 따른 그의 '절약' 강조의 한계 등이 지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자기계발 담론 속에서 꾸준히 소환되며, 개인의 책임과 노력을 통한 성취라는 메시지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스마일스가 남긴 유산은 이처럼 긍정적 영향과 비판적 성찰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5. 1. 빅토리아 시대

스마일스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자조론''(Self-Help)은 1845년 상호 발전 협회 요청으로 했던 강연에서 비롯되었다.[11] 이 강연에서 그는 지식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운명을 성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 머레이 출판사에서 1859년 출간된 ''자조론''은 스마일스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판매 수수료 10%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출판되었다.[13] 이 책은 출간 첫해에 2만 부가 팔렸고, 스마일스가 사망한 1904년까지 25만 부 이상 판매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14] ''자조론''은 스마일스를 하룻밤 사이에 유명인사로 만들었으며, 그는 여러 강연과 행사에 초청받는 등 큰 명성을 얻었다.[15][16]
''자조론''은 "19세기 중반 빅토리아 시대 자유주의의 성경"으로 불릴 만큼[21] 당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유당 국회의원 존 아서 로벅은 1862년 스마일스의 다른 저작을 "매우 주목할 만한 책"이라고 칭찬하며 그의 사상을 높이 평가했다.[22]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1889년 스마일스를 "현대 플루타르코스"에 비유하기도 했다.[23] 미국의 작가 오리슨 스웨트 마든 역시 젊은 시절 ''자조론''에 큰 감명을 받아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회 자유주의와 케인스 경제학이 부상하면서 스마일스의 '절약'과 '자조' 사상은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경제학자 존 A. 홉슨과 앨버트 F. 머머리는 1889년 저서에서 과도한 저축이 경기 침체 시 불완전 고용을 유발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6년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을 통해 기존 고전 자유주의 경제학에 도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마일스의 사상은 꾸준히 언급되었다. 1905년 윌리엄 보이드 카펜터 주교는 당시 일부에서 자조와 같은 전통적 가치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며 스마일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26] 노동당 국회의원 데이비드 그렌펠은 1932년 정부 정책을 비판하며, 해당 정책이 사무엘 스마일스가 강조한 자조와 절약의 미덕을 벌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27] 자유주의자 어니스트 벤은 1949년 자조의 미덕을 칭찬하면서 스마일스를 언급했다.[28] 1962년, 영국 경영 연구소의 소장인 존 마시는 산업계 젊은이들에게 봉사와 의무감, 자기 훈련이 필요하다며 "사무엘 스마일스의 자조론에는 아직 할 말이 있다"고 말했다.[29] 한편,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1976년 스마일스와 같은 작가들이 자유 시장 경제를 '가치 있는 사람에게 보상한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옹호한 것이 대중의 오해를 낳고 시장 질서에 대한 반감을 살 수 있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30]
5. 2. 한국에 미친 영향
새뮤얼 스마일스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자조론''(''Self-Help'')은 일본의 나카무라 마사나오에 의해 『서국립지편』(西国立志編)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이 번역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개인의 노력과 의지를 통한 성공을 강조하는 내용은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 전반에 걸쳐 주목받았다.한국 사회 역시 개화기를 거치며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서국립지편' 등을 통해 스마일스의 자조 정신이 소개되면서, 이는 당시 한국인들의 의식 개혁과 사회 발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스스로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을 이루려는 개인의 의지와 노력을 강조하는 내용은 근대적 가치관 형성 과정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자기계발 분야에서 스마일스의 사상은 꾸준히 재조명되고 있으며, 개인의 책임과 노력을 통한 성공이라는 그의 메시지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담론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5. 3. 일본 및 기타 국가에 미친 영향
스마일스의 대표작 ''자조론''(''Self-Help'')은 영국을 넘어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쳤다.특히 메이지 유신 시기 일본에서는 나카무라 마사나오가 1871년 ''자조론''을 ''서국립지편(西国立志編)''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은 당시 일본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히며 근대화 과정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자조론''은 이후에도 일본에서 여러 번역본으로 출간되었으며, 주요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번역자 | 제목 | 출판사/시리즈 | ISBN | 출간 연도 |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서국립지편 | 고단샤 학술문고 | ISBN 4061585274 | 1981년 |
다케우치 히토시 | 자조론 - 인생의 스승, 인생의 친구, 인생의 책 | 미카사 서방 | ISBN 4837956300 | - |
다케우치 히토시 | 스마일스의 세계적인 명저 자조론 - 깊이 생각하는 습관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 미카사 서방 지적 살아가는 법 문고 | ISBN 483797239X | - |
다케우치 히토시 | 향상심 - 뼈대 있는 자신론 | 미카사 서방 | ISBN 4837956432 | - |
다케우치 히토시 | 향상심 운명의 벽을 부수는 사람이 되어라 | 미카사 서방 지적 살아가는 법 문고 | ISBN 4837901891 | - |
다케우치 히토시 | 인생 성공! 노력의 법칙 - "자신의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은 강하다! | 미카사 서방 | ISBN 4837954561 | - |
다케우치 히토시 | 자기 실현의 방법 | 미카사 서방 지적 살아가는 법 문고 | ISBN 4837903134 | - |
모토아키 히로시 | 탐구심 - 일과 보람에 대해서 | 미카사 서방 지적 살아가는 법 문고 | ISBN 4837900062 | - |
나카무라 마사나오 (원역), 와타나베 쇼이치·미야지 히사코 (현대어역) | 자조론 서국립지편 노력은 반드시 보상받는다 (상) | 행복의 과학 출판 교양의 대륙 BOOKS | ISBN 978-4-86395-000-9 | 2009년 10월 |
나카무라 마사나오 (원역), 와타나베 쇼이치·미야지 히사코 (현대어역) | 자조론 서국립지편 노력은 반드시 보상받는다 (하) | 행복의 과학 출판 교양의 대륙 BOOKS | ISBN 978-4-86395-001-6 | 2009년 10월 |
나카무라 마사나오 (원역), 카나야 토시이치로 (현대어역) | 현대어 번역 서국립지편 스마일스의 『자조론』 | PHP 연구소 신서 856 | ISBN 978-4-569-80119-3 | 2013년 |
미국의 영감을 주는 작가 오리슨 스웨트 마든은 젊은 시절 ''자조론''을 읽고 스마일스에게 깊은 영감을 받아 전문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1894년에는 ''Pushing to the Front영어''을 저술하기도 했다.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그의 ''페이비언 사회주의 에세이''(1889)에서 스마일스를 "현대 플루타르코스"에 비유하며 그의 영향력을 인정했다.[23] 그러나 스마일스의 사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1976년에 스마일스와 같은 대중 작가들이 자유 기업을 '꾸준히 노력하는 가치 있는 사람에게 보상을 준다'는 방식으로만 옹호한 것이 시장 질서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제한하고, 결과적으로 시장 질서의 미래에 불길한 징조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30]
5. 4. 비판과 재평가
스마일스의 대표작 자기 계발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며 "19세기 중반 빅토리아 시대 자유주의의 성경"[21]으로 불릴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책은 스마일스를 유명인사로 만들었으며,[15] 조지 버나드 쇼는 그를 "현대 플루타르코스"라고 칭하기도 했다.[23] 미국의 작가 오리슨 스웨트 마든 역시 젊은 시절 이 책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회 자유주의와 케인스 경제학이 부상하면서 개인의 절약과 자조를 강조하는 스마일스의 사상은 비판에 직면했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존 A. 홉슨과 앨버트 F. 머머리는 1889년 저서 산업의 생리학에서 과도한 저축이 오히려 경기 침체기에 자본과 노동력의 활용을 저해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1936)을 통해 기존 고전 자유주의 경제학을 대체하고자 시도하며 스마일스적 사고방식에 도전했다.
실제로 스마일스의 '절약' 강조는 현실과 동떨어진다는 비판도 있었다. 당시 주택 협회 등은 절약을 미덕으로 내세웠지만, 은행 시스템 미비로 대다수 노동자는 소액 저축조차 하기 어려웠다.[24][25] 1932년 영국 노동당의 데이비드 그렌펠 의원은 실업 수당 관련 법안 토론에서 정부가 "열심히 일하고 절약하는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자조 정신을 처벌하고 있다"며, 이는 "사무엘 스마일스와 그의 모든 작품을 경멸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27]
하지만 스마일스의 사상은 시대 변화 속에서도 꾸준히 재평가되었다. 1905년 윌리엄 보이드 카펜터 주교는 스마일스의 자기 계발을 옹호하며 당시 확산되던 심미주의적 태도와 의무 경시 풍조를 비판했다.[26] 자유주의자 어니스트 벤 역시 1949년 자조의 미덕을 강조하며 스마일스를 긍정적으로 언급했다.[28] 1962년 영국 경영 연구소의 존 마시 소장은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스마일스의 자조 정신과 자기 훈련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29]
반면,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1976년 스마일스 식의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단순 논리가 오히려 자유 시장 경제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대중의 지지를 잃게 만들 수 있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30] 이처럼 스마일스의 사상은 시대적 상황과 관점에 따라 다양한 비판과 재평가를 받으며 현재까지도 논의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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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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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nest Benn Lim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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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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